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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상 무기/- 전투함

[한국] 참수리급 고속정. Chamsuri class patrol boat (PKM)

Chamsuri class patrol boat (PKM,Patrol Killer Medium)


[개발]

전투기 엔진을 사용하는 고가의 미제 백구급(돌핀급) 미사일 고속정의 대량 도입이 힘들자 백구급을 바탕으로 국내 개발된 고속정이며 초기엔 기러기 급으로 불리웠으며 중기형 이후 참수리급으로 불리웠다.여러 버전이 존재 하고 각 버전마다 당시 상황에 따라 무장을 달리 장착 하여 사용하였다.

주요 임무는 적 함정에 대한 대응과 항만방어, 대간첩 작전 및 연안 순찰이다.

[실전]

1999년 6월 15일 참수리급 고속정이 선수로 부딪쳐 막는 일명 "밀어내기 작전"으로 대응한 최초의 연평해전 이후, 한일월드컵이 막바지에 이른 2002년 6월 29일에 연평도 근해 북방한계선에서 북한의 보복성 선제공격으로 또 무력 충돌이 일어났다.

포격를 주고 받는 치열한 격전 후 대한민국의 피해는 6명이 전사, 18명이 부상하고 참수리급 고속정 357호가 침몰하였다.

참수리급 고속정은 1차 연평해전을 통해 고속정으로서의 우수성을 인정받았으나 또 다시 벌어진 보복성 2차 연평해전이라는 실전 결과 6명 사망 18명 전사 357함 예인중 침몰이라는 막대한 피해를 입어 비판이 대두 돼어 기존 장비의 소극적인 개량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개량]

무장으로 7.62 M60 기관총을 12.7mm K6 기관총으로 교체하고 거치대에 방탄판을 설치 하였으며 수병에게 신형 방탄헬멧을 지급하고 K2 소지후 전투배치 돼는 구역 8곳에 방탄판이 추가 설치 하였다.

또한 조천형 중사와 황도현 중사가 교전중 전사하게 되는 빌미를 제공한 20밀리 씨벌컨의 포탑 사수자리에 방탄판을 덧붙여 설치 하였으며

북한의 청진급의 85밀리 포에 선저부의 기관실 부위를 포격받아 전력 상실로 전투능력 상실의 원인이 되자 기관실 부위와 발전실 부위에 2중 철판 장갑을 설치 하였고

357정 선체내부에 해수침수로 인해 예인중 침몰하자 기존 60겔런의 펌프 용량을 250 겔런으로 증가 시켰다.

[고성능 신형함 건조]

고질적인 화력부족과 방어력 부족 등을 인지한 해군은 1999년 말부터 해군에서 차기 고속정 건조계획인 PKM-X가 구상되어 현재 윤영하급 고속함 (PKX) 이 양산되고 있다.

▼ 1개 참수리 고속정 편대는 3대의 참수리 고속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후기형 참수리고속정

▼ PKM 301 시리즈.참수리 후기형이라고도 불리우며
함수에 밀폐형 포탑에 장착된 40mm 60-cal Bofors 기관포 1문과 20-mm Vulcan 캐틀링기관포 2문 그리고 2문의 12.7mm 기관총을 탑재한다.

기본적으로 내탄성능이 전무하여 2차 연평해전에서 큰 인명피해를 입었다



▼ 참수리의 버전별 무장 현황

이 외에 몇가지 버전이 더 존재하며 all seavukcan 버전이 전기형과 중기형에 존재 했다고 한다.


▼ 전기형의 쌍열 애머슨 30밀리 기관포 (대공 장갑차 비호의 30밀리 기관포와 동형)


▼ 전기형 참수리 후방에 탑재된 개방형 포탑의 단장형 보포스 40밀리 자동포.


1차 연평해전 당시 모습으로 연평해전 비극의 주 원인이 된 일명 꼬리물기 기동중 하나인

" 차단기동 " 중인 참수리 고속정

현재 이러한 전투 개념은 삭제 되었으며 경고 후 위협사격으로 바뀌었다.


▼ 2연장 30 밀리 애머슨 전기식 자동포.

대구경화기가 주류인 대수상전의 특성을 본다면 장갑 능력은 전무 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전기형 참수리에 탑재된 에머슨 기관포탑 전면 출입구 유리와 강판에 방탄 능력이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 후기형 함미에 설치된 20밀리 씨벌컨 이 포탑의 장갑능력은 말 그대로 "無" 입니다.

바로 이 씨벌컨포탑 안에서 조천형 중사와 황도현 중사가 교전중 전사 하셨습니다.

▼ 편대 항행중인 중기형 참수리


▼ 중기형 참수리 고속정

후기형 PKM 201 시리즈, 중기형 참수리 고속정으로 불리우며
2연장 30mm 75-cal Emerlec EX-30 기관포 1문과 1~2문의 단장 20-mm Vulcan 개틀링기관포와
2정의 12.7-mm 기관총을 탑재한다.



▼ 초기형 PKM 201 시리즈

함미에 오픈식 포탑에 장착된 40-mm Bofors 60-cal Mk.3 1문과 함수의 2연장 30-mm 75-cal Emerlec EX-30 기관포 1문,

2문의 단장식 20-mm 70-cal. Mk. 10 대공용 기관포로 무장하였다.



▼ 1차. 2차. 연평해전의 전훈을 바탕으로 개발된 차기 유도탄 고속함 PKX-A 형 윤영하함.(PKG-711)


차기 고속정은 서해 특성상 어장의 어망으로 인해 프로펠로 추진 방식인 참수리 고속정과 PCC함이 빠르게 전장에 지원 투입될수 없었다는 것을 지적받아 워터젯 추진방식으로 도입 결정되었다.






아래는 2차 연평해전 당시 산화한 다섯용사의 소개글이다.

출처 : DCN

故윤영하 소령(정장, 해사 50기)

제 2연평해전 당시 참수리 357호정 정장 故 윤영하 소령이 위치해 있던 조타실은 적함의 집중공격 목표가 되어 가장 먼저 피격당하였고, 지휘관 故윤영하 소령은 조타실을 사수하기 위해 투혼을 발휘하다 장렬히 전사하였다. 항상 솔선수범하는 외유내강형의 지휘관으로서 정평이 나있던 윤 소령은, 국제적 역량을 갖춘 해군장교의 필요성을 강조했던 부친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영국에서 중ㆍ고등학교를 마친 후 해사에 입교, 1996년 소위로 임관하였다. 인헌무공훈장을 받은 부친(윤두호, 해사18기, 예비역 대위)과 해군 수병으로 전역한 동생 윤영민씨와 함께 자랑스러운 해군 가족의 일원이었다.

故한상국 중사(조타장, 부사관 155기)

교 전 당시 가장 먼저 적의 포격을 당해 큰 피해를 입었던 곳이 조타실과 통신실이다. 조타장이었던 故 한상국 중사는 적의 초탄에 전사하였으며, 함정의 침몰과 함께 실종되었다가 우리 해군의 인양작전을 통해 유해를 거둘 수 있었다. 故한상국 중사는 어업에 종사하던 부친과 함께 일찍부터 바다를 접하면서 해군의 꿈을 키워온 ‘진짜 바다사나이’였다. 평소 조용한 성격으로 병사들의 고민을 들어주기 좋아했던 그였기에 훌륭한 군인을 잃은 동료들의 안타까움은 너무나 컸다.

故조천형 중사(21포 사수, 부사관 173기)

21 포 사수였던 故 조천형 중사는 빗발치는 적의 포탄 속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두 손으로 함포의 방아쇠를 단단히 붙잡은 채 적을 향해 응사하다 장렬히 전사 하였다. 대전대학교 체육학과에 재학 중이던 1996년 8월, 해군에 입대하였으며 1998년 8월 부사관 시험에 합격, 직업군인의 길을 선택한 고인은 교전 발발 전 해에 중사로 진급 선발되었다. 함포를 관리하고 작동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병기사로서 높은 자부심을 바탕으로 근무하였으며, 전우들의 신망을 두텁게 받았던 모범적인 부사관이었다.

故황도현 중사(22포 사수, 부사관 183기)

22 포 사수였던 故 황도현 중사는 불굴의 투지로 전투에 임하다가 장렬히 전사 하였다. 숭실대 기계공학과 2학년 휴학 중 2000년 해군에 입대했으며 군 생활 중에도 늘 궂은일을 마다않고 솔선수범하여 ‘의리파 전우’로 불리는 등 동료들 사이에서 신망이 두터웠다. 성실하고 활달한 성격과 탁월한 이해력으로 어려운 이론을 숙지해야 하는 병기부사관 업무를 원활히 처리해 왔던 장병이다. 전역 후 복학하여 자신의 손으로 국산 함포를 제작하겠다는 포부를 늘 밝혀 왔던 터라 해군의 인재를 잃은 슬픔은 더욱 크다

故서후원 중사(M-60사수, 부사관 189기)

故 서후원 중사는 당시 M-60 사수로서 자신의 몸을 은폐하기도 어려운 함정의 중앙 갑판에 서서 적을 항해 대응사격을 하던 중 장렬히 전사하였다. 2001년 대구 기능대학을 졸업한 후 해군에 입대하였으며, 2002년 3월 참수리 357호정 내연사로 부임해 군 생활을 시작하던 중 적의 도발에 당당히 맞서 싸우다 장렬히 전사하였다. 고인은 단기복무기간이 끝난 후 사회인의 길을 선택하려 했으나 자신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꽃다운 청춘을 조국에 바쳤다.

故박동혁 병장(의무병, 해상병 456기)

교 전 당시 의무병이었던 故 박동혁 병장은 적의 기습공격으로 고속정 곳곳에서 부상당한 전우들을 돌보기 위해 투혼을 발휘하던 중 적 포탄에 집중 피격되어 중상을 입었으며 3개월 간의 투병 끝에 숨을 거두었다. 전투 직후 국군수도병원 으로 후송되어 많은 국민들의 관심과 함께 군 의료진들의 집중적인 치료와 수술을 받았으나 부상이 악화되어 2002년 9월 20일 새벽, 끝내 숨을 거두었다.

출처 : DCN 조현상 jyohen@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