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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 이슈

[펌] 요르단혁명에 즈음한 요르단-팔레스타인의 불편한 동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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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르단혁명에 즈음한 요르단-팔레스타인의 불편한 동거 2011-02-02 14:33:34

작성인
honecker 라쉬드 조회:824 추천:22



요르단 - 팔레스타인

어제 신문에 보니 요르단에서도 총리가 사임하고 내각해산 - 새로운 내각을 구성을 지시한 요르단 국왕 압둘라2세의 명령이 있었습니다.

튀니지에서 시작된 혁명은 점차 동쪽으로 점차 이동해 가면서 현재 가장 치열한 이집트를 비롯해요르단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집트의 혁명이 민주화, 빈곤문제 해결이라는 기치아래 행해지고 있으며 이는 중동전역에서의 혁명목적과 비슷합니다. 즉, 요르단도 겉으로는 민주화, 그리고 오랫동안 시달린 가난에서의 해방이 시위의 목적이 되는 것이죠. 사실요르단 왕정은 국민의 불만이 있을 때 마다 의회, 내각구성을 통해 국민들에게 미끼를 던지는 방식으로 왕정에 대한 위협을 붕쇄했었습니다. 덕분에 요르단 의회는 많은 해산-재소집이라는 경험을 하게 되지요. 해산된 내각대신 왕의 칙령으로 국가를 경영했던때도 많았습니다.

덕분에 이번 혁명 도미노에서 역시 국민들에게 민주화에 대한 희마을 심어주기 위해 역시나 내각을재소집하는 과거의 행보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만 요르단은 단순 요르단인의 봉기보다 한 가지 더 걱정하고 있는 것이있습니다. 바로 "팔레스타인인" 문제입니다.

1928년(이에 대해서는 많은 의견이 있습니다. 그동안 영국의 왕자국에서 정식국가로 승격한1946년을 정식 건국일로 보아야 하는가가 그것입니다.) 건국된 요르단 - 팔레스타인의 불편한 동거는 1948년 1차중동전쟁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차 중동전쟁에서 아랍5개 연합군중에서 요르단군만 유일하게 영토를 획득하게 됩니다. 바로 우리가웨스트뱅크 라고 부르는 요르단강(성경에서의 요단강)서안 과 동예루살렘을 획득하였습니다. 이는 당시 요르단군의 부사관-사관급인원, 고문단들이 2차대전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활약한 영국군출신 전역자, 현역사관들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요르단은 영국군의실전경험을 거의 그대로 물려 받았고 그밖에도 오랫동안 사막에서 생활한 베두윈을 중심으로한 요르단군의 인력자원은 확실히 유럽,미국등지에서 흘러온 유대인들의 그것보다는 더욱 유리했습니다.

특히나 당시 요르단 지역에서 가장 산업화 되어있었다는 요르단강서안(웨스트뱅크이하 WB)에 대한 요르단의 욕심은 당연한것이었습니다. 그 덕분에 초대 요르단 국왕인 압둘라1세는 전쟁초기 WB-동예루살렘을 점령한 이후 방어선을 점검하고 굳히기에 들어갑니다. 덕분에 요르단자체가 다른 4개 아랍국으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았고,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국가존망의 위기에서 가장 껄끄러운상대인 요르단군이 스스로 굳히기에 들어가니 이집트, 시리아쪽 전선으로 주력을 투입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당시 이스라엘 자체가팔레스타인인들이 생활하고 있던 WB지역에 대해 욕심을 낼 필요도 없었거니와 그럴 능력도 없었습니다. 요르단 여기 까지는 참좋았는데 압둘라1세 할아버지의 욕심이 슬슬 들어나기 시작합니다. 바로 WB와 동예루살렘을 요르단의 영토로 병합 시키고 해당지역의팔레스타인인들에게 요르단국민 자격을 부여, 시민권을 나눠 줍니다. 이에 대한 팔레스타인인들의 분노는 어쩌면 당연한 것 이었지요.이스라엘 놈들이야 워낙 나쁜놈들이라고 쳐도 같은 종교를 믿고 우리를 도와주는 것으로 기대했던 요르단놈들이 팔레스타인을 병합하니열받을 만도 하죠. 그 결과 1951년 7월 20일 동예루살렘 알아끄사 사원에서 예배에 참석하던 요르단 국왕 압둘라1세는팔레스타인 인의 총격3발에 암살당하게 됩니다. 이러한 국왕암살 이외에도 요르단의 팔레스타인 병합은 많은 한가지 더큰 문제점을안고 있었는데 바로 당시 병합된 팔레스타인 인구 100만이 요르단 국민수 보다 많다는 것 이었습니다.


1차 중동전에서 획득하고 3차에서 상실한 요르단강서안과 동예루살렘

압둘라1세의 지도력과 영국군 고문단, 베두윈 군의 활약으로 인해 획득한 WB와 동예루살렘은 결국1967년 3차 중동전에서 너무나도 허무하게 이스라엘에게 헌납합니다. 그런데 이와중에도 또 문제가 발생합니다. 바로 근 20년전1차 중동전때 팔레스타인을 병합하는 과정에서 뿌린 시민권이 그것입니다. SB, 동예루살렘의 팔레스타인인들은 유대인들과 사느니당당한 요르단국민으로써 요르단행을 택했고 요르단은 이걸 막을 방법 자체가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요르단에 유입된 팔레스타인난민들중에는 대이스라엘 게릴라 투쟁을 하던 폐다인 민병대를 비롯 많은 무장단체들이 같이 요르단으로 유입된 것 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민병대들이 밤에 이스라엘군 초소를 기습하면 이스라엘군은 당시 최신 무기를 동원하여 요르단을 포격하기 일수 였고, 이폐다인민병대들은 점점 간이 커져서 3차 중동전이후 친미정책을 추구한 후세인1세국왕에 대한 암살도 시도 하였으나 다행히 미수로끝납니다. 뿐만아니라 1970년에 요르단안에서 팔레스타인 국민정부까지 선포하니 후세인1세는 열받을 수 밖에 없었던 거죠. 결국후세인1세는 군을 동원해서 팔레스타인 민병대를 청소하기 시작합니다. 집요하리 만큼 끈질기게 추적해서 소탕을 한 덕분에 작전은최초 1주일로 예상했던 작전은 계속 연장되었고 때마침 PLO를 지원하는 시리아가 팔레스타인들에대한 지원을 명목으로 대규모기갑부대를 요르단으로 진격 시킬 준비를 합니다. 이에 후세인 국왕은 이집트가 제안한 정전안에 서명을 하는 동시에 미국에 지원을요청하여 미국은 다시 이스라엘에 통보 이스라엘군의 대규모 기갑부대가 시리아 국경근처에서 군사행동에 들어 갑니다. 결국 시리아군은요르단군을 도와주는 이스라엘군으로 인해 철수 할 수 밖에 없게 되지요. 후세인1세는 겉은로는 정전 안에 서명을 하였지만 속으로는내심 이를 갈고 있었습니다. 1970년 9월 16일에 발효된 정전안 이후 군과 정보대를 동원해서 비밀리에 PLO와 그 무장조직에대해 조사를 감행합니다. 그리고 다음해인 1971년 기습적으로 작전을 전개해서 불과 2주만에 PLO와 그 무장단체들을 철저히파괴시킵니다. 총을 들고 저항한 자는 대부분 사살되었고 그와 약간의 연관이 있는 사람들은 모조리 추방시켜 버리는데 이 추방된사람들이 향한 곳이 바로 중동의 파리 로 불린 중동에서 가장아름다운 도시 "레바논" 이었습니다. 애초 레바논군의 군사적 역량을띄어 넘는 이들 팔레스타인 무장단체들의 유입으로 인해 1971년 이후 레바논은 지난날의 영광은 뒤로 한 채 막장테크를 탈 수밖에 없었습니다. 세계 인들은 이 1970년 71년 사태를 "요르단내전" 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반해서 팔레스타인인들은"배신"이라고 생각합니다.

1차 중동전의 팔레스타인 병합으로 인해 안좋은 이미지를 남겼던 요르단은 어찌되었든 한번 더 아랍국가들에게 안좋은 이미지를심어주게 됩니다. 또한 팔레스타인인들의 요르단에 대한 반감은 그들의 이스라엘에 대한 반감 만큼 큰 그 무언가로 마음속에 남게되었습니다.

이후 요르단내 팔레스타인인들의 위협을 타파 하기 위해 후세인1세는 동예루살렘, 요르단강서안에 대한 영토포기를 공식 선언하였고,
1994년 이스라엘과 평화 조약을 체결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당시 추방되지 않고 요르단에 남아있던 팔레스타인인들은 요르단인이 되었을 까요? 뭐 겉으로는 요르단시민이니 그렇겠지만 요르단내부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알 수 있습니다.

실제 요르단인구 구성중 현재 60%가 팔레스타인인들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요르단의 하층민으로써 존재 합니다.
이러한 본토 요르단인과 팔레스타인인들의 계층화와 갈등을 보여주는 한가지 자료가 있습니다.
본토 요르단인과 팔레스타인계 요르단인의 서로를 보는 시각 차는 다음과 같습니다.

본토 요르단인이 팔레스타인계 요르단인을 보는 시각

1.민간사업의 대부분이 그들의 영향력안에 있다.
2.너무 많은 숫자가 염려스럽다.
3.요르단과 PLO 둘중 어디에 충성을 바치는지 의심스럽다.
4.요르단 시민으로서 누리는 혜택에 대해 감사 할 줄 모른다.

팔레스타인계 요르단인이 본토 요르단인을 보는 시각은 다음과 같다.

1.국가기관과 국영기업체의 고위층의 대부분은 그들이 차지 하고 있다.
2. 팔레스타인 출신이 인구수에 비하여 매우 낮게 행정부나 입법부에 반영되고 있다.
3.권력 핵심기관에는 전반적으로 본토인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4.정부 행정기관이 모든 행정업무에서 팔레스타인-요르단을 차별대우 한다

출처 : Abnan Abu-Odeh, 1999 235-236

이밖에도 요르단인구의 60%를 구성하는 팔레스타인계 요르단인에 대한 정치참여 의석수는 25%로법적으로 제한되어 있습니다. 결국 이들은 요르단내에서도 절대 다수를 차지 하지만 그냥 하층민일 뿐이죠. 50년간 2번의 요르단에의한 아픔, 그리고 요르단내에서의 차별받는 삶 만약 이번 요르단에서의 소요사태가 장기화 대고 더욱 커져 팔레스타인계 요르단인들이적극적으로 나선다면 현 PLO, 레바논에 위치한 많은 팔레스타인 무장조직들이 개입할 것이고 결국 이스라엘, 미국보다 더욱 똥줄타는 것은 현 국왕인 압둘라2세가 될 것입니다. 확률은 아주 극히 낮지만 2차 요르단내전 팔레스타인 VS 요르단이 다시 한번가능할 수도 있겠지요.


출처 : 자주 국방 네트워트 라쉬드 님 글.